고향·봄

프롤로그
성이 무너지던 마지막 밤. 모두가 물러난 성문 앞에, 한 기사가 남았다.

프롤로그
병사
기사님! 놈이 성문까지 왔습니다!
기사
모두 안으로 들어가라. 여기는 내가 막겠다.

성문 앞의 결투
폭우 속에서 고대 트롤이 성문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는 물러서지 않고 그 앞을 가로막았다.
태고의 트롤
또 인간인가.
기사
…….
태고의 트롤
비켜라. 성째로 짓밟아 주마.
기사
여기서 더는 못 간다.

성문 앞의 결투
기사가 검을 들고 고대 트롤에게 맞섰다. 그러나 거센 공격을 버텨 내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기사
크흑…
태고의 트롤
너같이 약해 빠진 녀석에겐 볼일 없다.
고대 트롤은 쓰러진 기사를 남겨 두고 떠났다.

프롤로그
기사
……미안하다.

프롤로그
시야가 서서히 흐려졌다.

프롤로그
흐릿한 청록빛이 어둠 속에서 번졌다.

첫 아침
아침 햇살이 성 안뜰을 비추고 있었다. 폰과 노인 앞에서 병사가 보급대의 소식을 전했다.
노인
폰! 이리 좀 와 보렴.
폰
응!
병사
어르신, 어젯밤 괴물들 때문에 성문 지지대가 갈라졌습니다.
노인
창고에 남은 목재는?
병사
거의 없습니다.
폰
내가 가져올까? 나도 도울래!
노인
네가? 숲까지 가야 하는데 괜찮겠니?
폰
응. 할 수 있어!
노인
그래. 싸우는 것만이 성을 지키는 일은 아니란다. 가까운 숲부터 가 보자꾸나.
노인이 앞장서고 폰이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열린 성문을 지나 나무를 구하러 숲으로 향했다.

성을 지킬 나무
폰은 가까운 숲으로 향했다. 도끼를 내리칠 때마다 성으로 가져갈 나무가 쌓였다.
모은 목재는 성문을 고치는 데 쓰였다. 작은 손으로 시작한 일이 밤의 방어선을 받쳐 주었다.

작은 손
성문은 밤새 버텼다. 폰이 가져온 나무가 부서진 지지대를 대신하고 있었다.
폰
내가 가져온 나무네. 나도 성을 지킨 거야?
노인
그럼. 검을 드는 것만이 지키는 일은 아니란다.
폰
그럼 오늘도 다녀올게!

작은 빛
나뭇가지를 줍던 폰 앞에 작은 빛이 나타났다. 가까이 다가가도 달아나지 않았다.
폰
안녕? 나랑 같이 갈래?
폰이 손바닥을 펴자 작은 빛이 내려앉았다. 손을 살짝 올리면 빛도 올라갔다. 둘은 한동안 같은 장난을 되풀이했다.
폰
너도 재미있어? 내일도 같이 놀자.
작은 빛이 폰의 손끝을 맴돌았다. 폰은 채집한 나뭇가지와 새 친구를 데리고 노인을 찾아갔다.

작은 빛
폰
할아버지, 채집하다가 작은 빛을 봤어. 내가 다가가도 사라지지 않았어.
노인
정령이 네게 다가왔구나. 이제 네 곁에 머물고 싶은가 보구나.
폰
할아버지도 정령을 만난 적 있어?
노인
오래전에. 우리처럼 스스로 뜻을 가진 존재들이란다.

모루 위의 반지
룬 광석과 반짝이는 돌이 모루 위로 모였다. 망치가 내려앉고, 반지가 빛을 띠기 시작했다.
제작이 끝났다. 이제 반지에 새길 영웅의 힘을 고를 차례였다.

반지가 부른 기억
폰
이 반지는 어떻게 영웅의 힘을 불러오는 걸까?

반지가 부른 기억
꼬마 정령이 다가오자 반지에서 금빛과 청록빛이 얽혔다. 오래전 방패를 들었던 한 영웅의 기억이 비쳤다.
폰
이 사람도 이 땅에서 싸웠던 영웅이야?
노인
그렇단다. 지금 새 영웅을 부른 건 아니야. 반지에 비친 옛 기억을 보고 있는 게지.
폰
그럼 반지 안에 사람이 갇혀 있는 건 아니네?
노인
그래. 그 사람이 남긴 마음과 싸움의 기억에 닿는 거란다.
폰
누구를 지키려고 싸웠을까?
영웅의 형상은 말없이 방패를 들고 있었다.
폰
그 마음을 우리도 이어 갈 수 있겠지?
노인
그럼. 네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을 떠올려 보렴.

꽃의 비석
꽃 사이에 오래된 비석이 있었다. 폰이 손을 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폰
그냥 돌인가?

꽃의 비석
꼬마 정령이 다가오자 꽃 문양이 빛났다. 아주 오래된 풍경이 한순간 비쳤다.
폰
방금…… 뭐였지? 너도 이 돌을 아는 거야?

검을 들지 않은 사람들
성벽 위에서는 병사들이 싸웠다.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나무를 나르고, 음식을 만들고, 무너진 돌을 쌓았다.
성문 옆 지지대가 기울었다. 병사 하나가 그 아래에 갇혔다. 나무를 나르던 사람들이 짐을 내려놓고 달려갔다.
몇 사람이 지지대를 받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병사를 끌어냈다. 곧 새 목재가 빈자리를 메웠다. 성문은 다시 버텼다.
폰
나랑 똑같네. 저 사람들도 싸우지 않는데 성을 지키고 있어.
노인
그래. 성을 지킨 것은 영웅만이 아니었단다.
폰
내가 모으는 것도 전부 이어져 있는 거네.
여름

태양의 비석
여름 길목의 비석에는 태양이 새겨져 있었다. 정령들의 빛이 이어지자 전쟁의 기억이 깨어났다.
폰
이번엔 정령들이 먼저 모여드네. 꽃의 비석도 이렇게 빛났어.
노인
그래. 이 비석에는 어떤 기억이 남아 있을까.

최초의 영웅
아주 오래전, 괴물들이 사람들의 터전을 덮쳤다. 한 정령이 사람들을 지키려는 인간에게 자신의 힘을 나눠 주었다.
폰
정령이 힘을 나눠 줘서, 저 사람이 더 강해진 거구나.
노인
인간과 정령이 같은 뜻을 품고 깊이 공명했을 때, 최초의 영웅이 태어났단다.

최초의 영웅
기억은 전장으로 이어졌다. 수호기사는 방패를 세워 병사들이 물러설 시간을 벌었다.
그 곁에서 마법사가 지팡이를 들었다. 보랏빛 마력이 몰려오는 괴물들을 밀어냈다.

최초의 영웅
다른 길에서는 광전사가 대검을 휘둘렀다. 괴물들이 흩어지자 피란민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 곁으로 달려든 적은 검투사가 막았다. 방패로 일격을 받아 내고, 빈틈을 향해 검을 찔렀다.
다크나이트는 대열의 뒤를 지켰다. 보랏빛 검기가 추격자들을 가로막는 동안, 마차는 성문을 빠져나갔다.
폰
다 다르게 싸우는데…… 지키려는 사람들은 같았구나.

최초의 영웅
노인
이들은 함께 괴물들을 몰아내고 균열을 봉했단다. 이 성은 그 봉인을 지키려고 세웠지.
폰
그럼 반지도 이런 영웅들의 기억과 이어져 있는 거야?
노인
그렇단다. 반지는 영웅을 가두는 물건이 아니야. 그들이 남긴 공명의 기억에 닿게 해 주지.
폰
다시 살아난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남긴 기억인 거네.
노인
가장 강했던 의지와 전투의 기억이 잠시 모습을 얻는 거란다.
가을

낙엽의 비석
낙엽 아래 비석이 빛나자 젊은 기사 둘이 나타났다. 마르스와 아직 늙지 않은 수호자였다.
마르스
오늘은 검을 잘 썼다. 그런데 옆에 선 사람은 한 번이라도 돌아봤느냐?
젊은 수호자
……못 봤습니다. 이기는 데만 정신이 팔려서요.
마르스
다음에는 같이 돌아오는 것까지 해내거라.
폰
저 사람…… 할아버지? 할아버지도 옛날에는 기사였구나.
노인
그래.
폰
엄청 강했어?
노인
글쎄. 끝까지 지켜내지는 못했으니까.

검이 응답한 날
젊은 수호자는 사람들을 피신시키다 무기고의 낡은 검을 집어 들었다.
수호정령
아직 지키고 싶은 것이 남았는가?
젊은 수호자
있습니다. 그들을 지킬 수 있도록, 제게 힘을 나눠 주십시오.

검이 응답한 날
정령의 빛이 검에 깃들었다. 지친 수호자의 몸에 다시 힘이 차올랐다.
폰
정말 할아버지였어…… 그래서 계속 성을 지킨 거야?
노인
그래. 지키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거든.
겨울

부서진 비석
깊은 금이 비석의 문양을 끊어 놓았다. 정령의 빛은 갈라진 두 조각 사이에서 흩어졌다.
폰
왜 이것만 안 보이지? 더 강해져야 하나?
노인
힘으로 밀어붙일 일은 아닌 것 같구나. 정령들과 함께 끊어진 문양을 이어 보자꾸나.

영웅이 되고 싶었던 기사
정령들이 금 양쪽의 문양을 빛으로 이었다. 기억은 성이 불타기 전, 마르스가 왕국에서 가장 강한 기사였던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마르스
평생 검을 갈고닦았는데, 이 힘을 쓸 날이 오지 않는다면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
젊은 수호자
싸울 일이 없는 건 좋은 거잖습니까.
마르스
너는 아직 모른다. 힘이 있는데도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기분을.
그의 바람은 사람을 지키는 것보다, 자신의 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다시 열린 균열
마르스는 옛 영웅들이 남긴 봉인 앞에서 검을 들었다. 무엇이 나오든 자신이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젊은 수호자
스승님, 뭘 하시는 겁니까?
마르스
걱정 마라. 내가 막을 수 있다.

다시 열린 균열
마르스의 검이 봉인을 갈랐다. 작은 괴물들은 쓰러뜨렸지만, 그 뒤에서 거대한 존재가 눈을 떴다.
젊은 수호자
스승님…… 이건 우리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균열은 멈추지 않고 벌어졌다. 봉인의 기록과 공명 유물이 그 안으로 휩쓸려 갔다.
폰
그래서 그 거미가 반지 제작서를 가지고 있었던 거구나……

기억의 틈
폰
잠깐…… 이 장면……
노인
왜 그러느냐?
폰
모르겠어. 그런데 알아.
노인
이건 비석에 남은 내 기억이 아니다. 빛이…… 네게서 나오고 있구나.

암전 너머
폭우, 부서진 검, 쓰러진 기사. 끝났다고 생각했던 장면이 다시 이어졌다.
기사
……결국 못 지켰어.

암전 너머
수호정령
아직 끝나지 않았어.
기사
다 끝났어. 성도…… 사람들도……
수호정령
한 번만.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으로 돌려보낼게.

투구 아래
금 간 투구 아래로 눈과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낯설 만큼 자란 얼굴이었다.
폰
……저 사람…… 나야.
비석의 역사가 아니었다. 폰 안에 봉인된, 아직 오지 않은 날의 기억이었다.

남겨진 부탁
미래의 폰
기억해야 해. 그래야 이번에는—
수호정령
안 돼. 그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가면, 너는 또 혼자 모든 걸 짊어질 거야.
미래의 폰
그러면 너는?
수호정령
이번에는…… 혼자 싸우지 마.

남겨진 부탁
계절이 거꾸로 흘렀다. 폐허가 성으로 돌아가고, 기사는 어린 소년이 되었다.
정령은 먼 시간을 되돌릴 힘을 모두 썼다. 그 빛이 다할 때, 폰의 미래 기억도 깊이 봉인되었다.

남겨진 부탁
노인
폰! 이리 좀 와 보렴.

남겨진 부탁
목소리가 멀어지자 눈 덮인 비석이 다시 보였다. 폰은 곁에 선 노인을 바라보았다.
폰
……그날이었구나. 나를 돌려보내고, 그 정령은……
노인
내 검에서 들었던 목소리구나. 네 곁에서도 끝까지 함께했어.
폰
잊지 않을게. 이번에는 그 부탁을 지킬 거야.
귀환

다른 길
폰
할아버지는 계속 여기서 막고 있었던 거야?
노인
그래. 나는 이 성을 지키는 것밖에는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단다.
폰
하지만 계속 막기만 하면 끝나지 않아. 난 다른 길을 찾을게. 균열이 시작된 곳까지 갈 거야.
노인
가거라.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네 곁에 선 모두와 함께.

이번에는 함께
처음에는 한 정령이 모든 빛을 내어 폰을 살렸다. 이제 그의 곁에는 수많은 동료가 있었다.
노인
서로를 지켜 주거라. 돌아오면 너희 이야기를 들려주렴.
폰
응. 이번에는 함께 갈게.